조선 건국의 초대 왕이였던 이성계는 고려의 중요 무신중 하나였습니다.
1388년 명을 받고 북진하던 이성계는 자신의 인생의 중요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앞서 설명드렸던 고려의 위기 및 조선의 건국에서 위화도 회군은 아주 중요한 사건인데
이 위화도 회군의 상세한 전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배경: 고려 말, 불안정한 정권
14세기 말, 고려는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의 부패와 관리들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고,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과 빈곤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원나라의 간섭과 왜구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새롭게 부상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1388년, 명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철령 이북의 영토를 요구하며 압박을 가해왔습니다. 이는 고려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고, 친원 세력과 반원 세력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우왕과 최영 장군을 중심으로 한 친원 세력이 주도하고 있었고, 그들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며 이성계와 이지란을 포함한 군대를 요동 정벌에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위화도 회군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위화도 회군의 전개
1. 요동 정벌의 시작
고려 조정은 명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요동을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성계는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388년 4월, 약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 원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명나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려군은 장기 원정에 필요한 물자와 사기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2. 위화도에서의 결정
군대가 압록강 인근의 위화도(현재 북한과 중국 국경 부근)에 이르렀을 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압록강은 수위가 높아 도강이 어려웠고, 군대의 보급품은 부족했습니다. 이성계는 장군들과 신진사대부(정도전 등)와 논의한 끝에, 요동 정벌이 고려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는 명나라와의 전쟁 대신 고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았습니다.
1388년 5월, 이성계는 군대를 돌려 수도 개경으로 회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단순한 군사적 후퇴가 아니라, 고려 조정에 대한 반발과 개혁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가며 친원 세력의 중심인 최영과 우왕을 겨냥했습니다.
3. 개경 점령과 권력 장악
회군한 이성계의 군대는 빠르게 개경에 진입했습니다. 이성계는 최영을 체포하고 처형했으며,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새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는 사실상 쿠데타였으며,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고려 조정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의 기존 권력 구조를 뒤흔들었고,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의 결과
위화도 회군은 단기적으로는 고려 조정의 권력 교체를 가져왔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주요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친원 세력의 몰락: 최영과 우왕을 중심으로 한 친원 세력이 제거되면서 고려 조정의 권력 구조가 재편되었습니다. 이는 신진사대부와 이성계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 이성계의 정치적 기반 강화: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군사적 리더십과 결단력을 보여주며 그를 새로운 정치 세력의판의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 조선 건국의 초석: 회군 이후 이성계는 정도전 등과 협력하여 토지 개혁(과전법)과 유교 중심의 정치 체제를 준비했습니다. 이는 1392년 조선 건국으로 이어졌습니다.
- 고려의 종말: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으며, 불과 4년 뒤인 1392년에 고려는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역사적 의의
위화도 회군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고려의 부패한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성계의 전략적 판단과 신진사대부의 개혁 의지가 결합된 결과였으며, 유교를 기반으로 한 조선의 정치 체제를 예고했습니다. 또한,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함으로써 한반도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이성계의 현실적 판단은 이후 조선 초기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권력 교체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은 이후 왕자의 난(1398, 1400)과 같은 내부 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한국 역사에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순간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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