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9

(역사)1962년 중인전쟁 무력충돌로 번진 인도와 중국

2025년 기준 현재 인도와 중국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실제 카슈미르와 아루나찰프라데시 일부 영토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상태이면서, 중국의 과도한 팽창을 막기 위해 미국과도 긴밀히 협력하는 상황이죠. 실제 1962년에 국경분쟁을 이유로 전쟁이 벌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20세기 아시아의 역사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인 1962년 중국-인도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 전쟁의 배경1.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국경선중영 조약의 모호성으로 인해, 영국 식민지 시절 설정된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이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중국은 이를 부정하고, 아크사이친(Aksai Chin)과 아룬찰 프라데시(당시 NEFA)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했습니다.2. 달라이 라마 망명..

(역사)고려와 원나라, 30년간 이어진 긴 전쟁

고려는 요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아픔을 겪었지만 그보다도 큰 아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몽골제국이 중국을 집어 삼키고 고려를 노리기 시작했는데결국 고려는 몽골 제국에게 패배하여 결국 부마국으로 편입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고려와 몽골제국 , 고려와 원나라 그 전쟁의 전개와 결말을 알려드립니다. 전쟁의 배경 – 세계를 뒤흔든 몽골, 고려를 넘보다13세기 초,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전역을 정복하며 전례 없는 제국을 형성합니다.고려는 당시 무신 정권 하에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이를 틈타 몽골은 고려에 조공과 복속을 요구하게 됩니다.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고 강경한 대응을 선택하며 결국 전면전이 시작됩니다.전쟁의 전개 – 6차례의 침입과 고려의 전략1차 침입 (1231년)몽골군은..

(역사) 발해와 통일신라의 전쟁

서로 다른 통일의 꿈이 충돌한 전쟁 이야기676년,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하며남한 지역 대부분을 아우르는 ‘통일신라’를 건국합니다.한편 698년, 북쪽 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발해’**가 등장합니다.이 두 나라는 한민족의 뿌리를 공유했지만,서로 다른 방식의 국가 운영과 영토 인식 차이로 인해 긴장을 겪게 되죠.결국 두 나라는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국경을 둘러싼 분쟁과 전쟁을 이어가게 됩니다.1. 전쟁의 원인 – 한반도 북방의 주인은 누구인가?▪ 통일신라의 시선신라는 고구려・백제・신라를 포함하는 ‘한민족 전체의 통일’을 꿈꿨습니다.따라서 북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이 아닌, 반란 세력 또는 이질 국가로 인식했죠.▪ 발해의 입장발해는 고구려를..

(역사)함께 백제·고구려를 무너뜨린 두 나라, 왜 싸우게 되었을까?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이야기신라와 당나라는 7세기 중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손을 잡고 나당동맹을 체결했습니다.하지만 통일이 가까워질수록 두 나라는 점점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며,결국에는 적에서 동맹, 다시 적으로 변하는 전쟁,바로 **나당전쟁(신라–당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오늘은 이 전쟁이 왜 일어났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1. 배경 – 왜 동맹이 깨졌는가?▪ 나당동맹의 출발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막기 위해중국의 당나라와 손을 잡고 군사 동맹을 체결합니다.이후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며한반도의 삼국은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당나라의 속셈당나라는 단순히 신라를 돕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뒤, 한반도 전..

(역사)고구려의 최후

동북아를 지배하던 초강대국 고구려(高句麗).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을 수차례 막아내며 그 강성함을 과시했던 고구려는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로 손꼽힙니다.하지만 결국 668년,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하고 맙니다.그 마지막 전쟁의 과정은 외침뿐만 아니라 내부 분열까지 겹친 비극의 역사였습니다.1. 전조 – 삼국의 불안한 외교 판도7세기 중반, 삼국의 정세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었습니다.고구려: 연개소문의 철권 통치 아래 외세를 견제했지만, 내부는 불안백제: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신라: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당나라와 손잡고 나당 동맹 체결➡ 고구려는 사실상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강력한 외세(신라+당)의 협공 대상이 되어버립니다.2. 백제 멸망, 그리..

(역사)고구려의 대정복기 : 부여를 복속하고, 후연을 굴복시키다

고구려는 단순한 방어적 국가가 아니었습니다.5세기 초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대를 거치며북방과 서방으로 눈을 돌려 본격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펼쳤죠.그 중심에는 고구려가 주변 강국이던 부여와 **후연(後燕)**을 어떻게 굴복시키고자신의 세력권 아래 두었는지가 핵심이 됩니다.1.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부여는 고조선 멸망 이후 만주 지역에 존재했던 강력한 고대 국가로,고구려와 같은 부여계통의 민족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여는 정치적으로 쇠퇴했고,고구려는 이 틈을 노려 부여를 자신의 세력 아래로 편입하고자 했습니다.💠 부여의 복속 (427년 무렵)장수왕(광개토대왕의 아들)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427)**하면서남진 정책과 함께 북방의 부여 정벌을 병행했습니다...

(역사) 원삼국시대 원대했던 그 시대의 장렬한 황산벌 전투

안녕하세요! 오늘은 삼국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 중 하나인 황산벌 전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이 전투는 단순한 싸움을 넘어서, 나라의 운명과 장수들의 충절, 그리고 역사 속 슬픔과 감동이 녹아있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배경: 삼국 통일을 향한 신라의 야망7세기 중반, 삼국은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신라는 점점 커지는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서 위협을 느꼈고, 결국 당나라와 손을 잡아 백제를 정복하기로 결심합니다.이에 따라 660년, 신라는 김유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육군과, 당나라의 해상군이 협공하여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전투의 시작: 황산벌에서 만난 백제의 결사대황산벌(현재의 충남 논산 일대)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신라군이 이곳을 지나야만 사..

(역사)원삼국시대 이전 대내외 전쟁

1. 옥저와 고구려의 충돌시기: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경내용: 고구려가 국가 체제를 강화하고 팽창하던 과정에서 동북 지역의 옥저를 병합했습니다.고구려의 태조왕(53~146년 재위) 시기에는 옥저를 정복하고 고구려의 지배하에 편입시킵니다.의미: 옥저는 독자적인 부족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종속국이 되었습니다.2. 동예와 고구려의 갈등시기: 기원후 1세기~3세기내용: 동예는 해산물이 풍부하고, 특산물(단궁, 반어피, 과하마 등)이 많았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고구려는 태조왕 시기부터 동예를 공격해 지배권을 확대하였습니다.결과: 동예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 되었고, 이후에는 실질적인 독립성이 약화됩니다.3. 삼한 내 소국 간의 분쟁시기: 기원전~기원후 3세기..

(역사)한국사 최초의 국가간 전쟁 고조선-연 전쟁의 대하여

기원전 3세 경,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아니지만,한반도 바로 위쪽 요동 지방에서 일어난 최초의 한국사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고조선과 연나라간의 전쟁인데, 고조선의 한국사 자료가 많지 않아전쟁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만,지금까지 알려진 전쟁의 대한 내용과 삼국사기를 근거로한 전쟁의 전개방식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연나라의 고조선 영토 침략기원전 3세기 경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영토로 침략하였습니다.왜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요동지역의 인접국가들이였던 만큼 영토 확장그 원인이라고 봅니다.  2. 전쟁의 진행 과정연나라 장수 진개는 고조선을 그냥 침략한 것이 아닌, 기습적인 방식을 선택했습니다.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고조선은 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