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56

(역사)고려의 주요 전쟁

통일 후 고려는 이전의 다른 나라처럼 외부 세력과의 충돌이 잦았습니다.고구려의 땅을 회복하기 위함도 있으며, 외부 세력이 침입하는 경우도 많았지요.수 많은 전쟁 중 굵직굵직한 전쟁은 어떤것이 있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1. 거란과의 전쟁 (요나라와의 1·2·3차 전쟁)전개 과정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고려는 북방의 강국 **거란(요나라)**와 세 차례에 걸쳐 큰 전쟁을 치렀습니다.1차 침입(993년): 거란이 고려를 압박하며 침입. 이때 서희가 외교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얻고 전쟁 없이 위기를 넘김.2차 침입(1010년): 강조의 정변을 이유로 거란이 개경을 함락시킴. 고려는 수도를 버리고 항전하는 전략으로 버텨 거란군 철수.3차 침입(1018~1019년):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

(역사) 고려의 외교

고려는 918년에 건국되어 약 500년간 지속된 중세 왕조로, 내부적으로는 호족과의 연합, 외부적으로는 강대국과의 외교 전략을 통해 비교적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려의 대내 정책과 대외 관계를 중심으로 그 정치적 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대내 관계 – 호족과 문벌 귀족, 그리고 불교1. 호족과의 연합 정치 🤝고려 초기 왕건은 후삼국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과의 동맹을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고려 건국의 기반이자 지방 통치의 핵심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협력은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데 필수였습니다.혼인 정책: 왕건은 여러 지방 호족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유대를 공고히 함훈요 10조: 호족 세력의 협조를 유지하고 불교 기반의 정치를 제시2. 문벌 귀족의 형성과 권력 집중 ..

(역사)후삼국의 종지부 일리천 전투

936년, 한반도 남부의 들판에서 역사적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바로 **고려와 후백제가 벌인 '일리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후삼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고려의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낸 결정적 사건이었으며, 수많은 전략과 인간 드라마가 얽힌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합니다.이번 포스트에서는 일리천 전투의 배경, 전개, 그리고 결과를 단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전투의 배경 – 가족의 분열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다후백제의 왕 견훤은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지만, 말년에 장남 신검과의 갈등이 심화되며 내부 분열을 겪게 됩니다. 결국 935년, 신검은 아버지 견훤을 유폐시키고 정권을 강제로 탈취합니다.이에 분노한 견훤은 유폐된 곳에서 탈출해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며 “아들을 응징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왕건은 이 기회를..

(역사)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

한반도는 신라의 오랜 통일 이후 다시 혼란에 빠지며 후삼국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 궁예의 후고구려, 견훤의 후백제, 그리고 남은 신라까지, 세 나라가 서로 대립하며 한반도는 전쟁과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왕건이며, 그는 뛰어난 정치력과 외교 전략으로 통일의 길을 열었습니다.이번 글에서는 고려가 어떻게 후삼국을 통일했는지, 그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보겠습니다.1. 고려의 건국 – 후고구려를 계승하다 (918년)후삼국의 시작은 신라의 쇠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방 호족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고, 이 틈을 타 궁예는 후고구려(나중의 태봉)를 세웁니다. 그러나 궁예의 폭정은 결국 부하들의 반란을 초래했고, 그 중심에 있던 왕건이 918년 고려를 세우며..

(역사)돌궐과 고려 유구한 역사

우리가 흔히 배우는 고려의 외교 관계는 주로 송, 거란, 여진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유목 제국 ‘돌궐’과 고려 사이에도 간접적인 관계와 역사적 접점이 존재합니다. 이 글에서는 돌궐이라는 제국의 개요와 고려와의 관계를 살펴보며, 한반도와 중앙아시아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는지 알아봅니다.돌궐이란 어떤 나라인가?돌궐은 6세기 중엽 중앙아시아에 등장한 튀르크계 유목 민족의 제국으로, ‘고돌궐’과 ‘후돌궐’로 나누어집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몽골 고원에서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 인근까지 세력을 넓히며 실크로드를 장악한 강력한 유목 제국이었습니다.이들의 언어는 고대 튀르크어 계열이며, 특히 오르혼 비문은 돌궐의 역사와 문화, 왕조의 위엄을 생생히 보여주는 중요한 ..

(역사)이름부터 왕이 들어간 왕건의 일대기

혼란의 후삼국 시대, 수많은 영웅들이 각자의 깃발을 들고 나라를 세웠지만, 그 끝을 장식한 승자는 바로 **왕건(王建)**이었습니다. 고려의 건국자인 그는 바다를 누비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결국 통일 국가 고려를 세우며 한반도의 새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왕건의 출생부터 고려 건국까지의 여정을 흥미롭게 따라가 봅니다.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왕건왕건은 877년, 지금의 개성(송악)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왕륭(왕융)**은 당시 송악 지역에서 활약하던 부유한 해상 무역 상인이자 지역 호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한씨 부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건은 어릴 때부터 바다와 무역에 익숙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됩니다.이러한 배경은 훗날 그가 해상 전략과 경제에 밝은 통치자로 성장하는..

(역사)민초에서 왕까지 견훤의 역사

삼국시대 이후 혼란기에 다시 등장한 후삼국 시대는 궁예, 견훤, 왕건이라는 세 인물이 주도한 시대였습니다. 이 중에서도 **견훤(甄萱)**은 가장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히는데요, 미천한 농민 출신에서 후백제의 왕으로까지 올라간 그의 인생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견훤의 일생과 그의 정치, 그리고 역사적 평가까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농민에서 장수가 되기까지견훤은 867년경 경상도 상주 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확한 출신 성분은 명확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료는 그가 평민 또는 농민 출신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사적 재능과 지도력으로 신라의 지방군에서 빠르게 성장했고, 결국 장군의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후백제의 건국당시 신라는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들의 ..

(역사) 후고구려의 왕 궁예 그는 누구였을까?

고려의 전신인 태봉(泰封), 또는 후고구려를 세운 인물 **궁예(弓裔)**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뛰어난 지도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광기에 휩싸여 몰락한 비극적인 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궁예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가 남긴 역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출신과 초기 생애궁예는 869년경, 신라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어린 시절 한쪽 눈이 실명된 탓에 불길한 인물로 여겨져 왕족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이후 사찰에서 자라며 불교에 심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왕이 된 이후에도 ‘미륵불’을 자처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후고구려의 건국9세기 말, 신라는 정치적 혼란과 농민 봉기로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었습니다...

(역사)한반도, 다시 삼국으로 나뉘다.

**통일신라(676~935)**는 삼국을 통일한 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지만,9세기 후반부터 왕권 약화와 귀족의 분열, 농민 봉기와 지방 호족의 대두로 인해국가 전체가 점점 무너져가기 시작합니다.결국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통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그 틈을 타 새로운 지역 세력들이 각기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며후고구려(태봉)・후백제・신라의 후삼국 시대가 시작됩니다.1. 통일신라의 붕괴 – 후삼국의 서막신라는 오랜 세월 동안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했지만,9세기 말이 되자 지방 호족 세력이 급속히 성장합니다.농민 반란(대표적으로 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왕권 약화와 관료 정치 붕괴왜구의 침입과 외교력 상실📌 이 혼란을 틈타, 지방 유력자들은 자신만의 무력과 행정조직을 갖추고 독립 세력화하게 됩니다.2...

(역사)찬란한 역사를 지닌 신라 그 불빛이 꺼지다

676년,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라는한반도 남부 대부분을 장악하며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됩니다.이후 약 200년간 문화・예술・불교・과학 등다양한 분야에서 황금기를 누리게 되죠.하지만 그 영광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9세기 후반부터 통일신라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그 이유는 단지 외부 침입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1. 골품제도의 한계 – 신분 제도가 가른 희망신라의 골품제는 왕족부터 평민까지 출신에 따라 신분과 관직을 제한한 제도입니다.초기에는 왕권 안정에 기여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급 간 갈등과 불만이 커졌습니다.특히 진골 귀족 외에는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없었고,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사회적으로 억눌리며 정치 발전이 멈추게 됩니다.결과적으로, 청년층과 중하층 귀족층이 점차 이탈하거나 반발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