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 sense History(역사 공부)

(역사) 발해와 통일신라의 전쟁

upsense 2025. 4. 14. 10:30

서로 다른 통일의 꿈이 충돌한 전쟁 이야기

676년,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하며
남한 지역 대부분을 아우르는 ‘통일신라’를 건국합니다.
한편 698년, 북쪽 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발해’**가 등장합니다.
이 두 나라는 한민족의 뿌리를 공유했지만,
서로 다른 방식의 국가 운영과 영토 인식 차이로 인해 긴장을 겪게 되죠.

결국 두 나라는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국경을 둘러싼 분쟁과 전쟁을 이어가게 됩니다.


1. 전쟁의 원인 – 한반도 북방의 주인은 누구인가?

▪ 통일신라의 시선

  • 신라는 고구려・백제・신라를 포함하는 ‘한민족 전체의 통일’을 꿈꿨습니다.
  • 따라서 북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이 아닌, 반란 세력 또는 이질 국가로 인식했죠.

▪ 발해의 입장

  •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정통성을 내세우며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습니다.

📌 결국, 같은 뿌리를 가진 두 나라가 ‘고구려의 후계국’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된 것입니다.


2. 전쟁의 전개 – 국경에서 벌어진 충돌

통일신라와 발해의 전면전은 아니었지만,
양국은 국경선(함경도와 강원도 북부) 주변에서 지속적인 무력 충돌을 겪었습니다.

📌 대표적인 무력 충돌

  • 8세기 중반 ~ 9세기 초까지
    발해가 점차 세력을 넓히며, 한반도 북부로 진출을 시도
  • 신라는 북방 국경선 방어를 강화하고,
    강원도 북부, 함경도 남부 일대에서 군사적 저항 전개

3. 대표 장수 –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일부 전해짐

정확한 대규모 전쟁 기록은 많지 않지만,
신라와 발해 사이의 군사 충돌에 등장하는 대표 인물과 장수들이 일부 문헌에 전합니다.

▪ 통일신라 측

  • 김양상(후일의 성덕왕):
    발해의 세력 확장에 대비하여 북방 방비 강화와 요새 구축을 지시한 인물로 언급됨
  • 지방 장수들 중심으로 접경 지역의 방어 책임자들이 활동

▪ 발해 측

  • 대흠무(발해 제3대 무왕):
    가장 적극적으로 대외 정책을 펼쳤으며, 신라와의 군사 충돌도 주도
    당나라・일본과의 외교적 균형 속에서 신라와 국경 마찰 발생

📌 특히 무왕 시기(8세기 초반), 발해가 신라 국경을 위협하는 움직임을 보이며
신라는 북쪽 방어를 강화하고, 대외 외교를 조율하게 됩니다.


4. 전쟁의 결과 – 대결은 이어졌지만, 전면전은 피함


양국 피해 소규모 국경 충돌 지속, 대규모 전쟁은 없음
전면전 없음 이유 신라는 당나라와 외교에 집중, 발해는 북방 개척에 주력
장기적 결과 국경선 확정 없이 팽팽한 대치 → 함경도 일부는 발해가 차지

양국은 결국 군사적 대결보다는 외교・문화 경쟁 구도로 전환됩니다.


5. 역사적 의의 – 같은 뿌리, 다른 길

  • 신라와 발해는 같은 고대 한민족의 후예였지만,
    국가 운영 방식과 외교 전략, 정체성 표현에서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 이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남북 분단 구조의 원형’**처럼 이해되기도 합니다.

📌 결국 신라는 한반도 남부의 통일국가,
발해는 **만주와 북방 중심의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서로 다른 문명권의 축을 형성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