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 sense History(역사 공부) 76

(역사)독립 후 두 이념의 대립

광복 이후, 격돌하는 두 사상1945년 8월, 일제의 패망과 함께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지만, 남한 사회는 이내 격렬한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이 가운데, 정치·사회적으로 상징적인 인물로 떠오른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우익의 상징 ‘김두한’과 좌익 정치인이자 언론인이었던 ‘장진영’입니다.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히 인물 간의 충돌이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을 양분하던 민주주의(우익)와 공산주의(좌익)의 대표적 상징 대결로 기록됩니다. 🧍 김두한 – 거리의 우파 투사에서 정치인으로김두한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주먹계의 전설이자, 해방 이후에는 극우 민족주의 정치인으로 변모한 인물입니다. 그는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배경과 함께, 친일파 숙청과 반공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인물로 이름을 ..

(역사)제주도 최대의 비극 제주 4.3사건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과 무력 충돌을 포함한 국가 폭력에 의한 대규모 인권 유린 사건입니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본격화되었기에 '4·3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지역적 폭동이 아니라, 해방 이후 남북 분단 과정 속에서 이념 갈등, 경찰의 탄압, 군정의 억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비극입니다.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여러 제주도민과 한국사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배경: 혼란의 해방기, 억눌린 민심1. 해방 이후의 혼돈1945년 8월 광복 이후, 한반도는 미·소 양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한은 미군정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제주도 역시 미군정 아래 있었지만, 행정과..

(역사)연이은 반란, 갑신정변

갑신정변은 1884년 10월 조선에서 개화파 인사들이 정권을 장악하고자 일으킨 무장 정변입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고, 이 상황에서 일본의 개입은 개화파들이 자신들의 뜻을 펼치기 좋은 시기로 생각하였죠. 비록 이 사건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의 근대화 시도와 외세의 정치적 개입이 맞부딪친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배경: 무너진 개혁의 꿈, 다시 시작하려 한 혁명1. 임오군란의 여파2년 전인 1882년, 임오군란으로 개화파는 큰 타격을 입고, 정권은 보수적인 친청 세력에게 넘어갔습니다. 개화파는 청나라에 망명하거나 활동이 위축되었고, 개화의 길은 막힌 듯 보였습니다.2. 청과 일본의 대립하지만 1884년 들어, 청나라가 프랑스와의 전쟁(청-프 전쟁)으로 인..

(역사)차별에 의한 내전 임오군란

조선시대가 구한말에 들어서면서 세계 각지에서는 신식병기 및 개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도 예외는 아닌데요.다만 신식병기를 도입하면서 차별에 따른 반란을 일으킨 사건인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년) 6월에 조선 한성(현재의 서울)에서 일어난 구식 군인들의 반란으로. 이 사건은 조선 후기 근대화 과정에서의 사회적 갈등과 외세의 개입이 맞물려 발생한 대표적인 반란 사건입니다. 이 군란은 단순한 군사 폭동을 넘어, 조선의 개화 정책에 대한 반감, 그리고 외세의 부당한 영향력 확대에 대한 반발을 함께 담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차별적인 군제 개편, 생활고, 부정부패, 그리고 일본의 개입이라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배경: 서러움과 분노가 쌓이다1. 구식 군인들의 처우 악화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역사)조선 후기 외교의 변화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문치주의 국가였습니다. 그런 조선이 1636년, 청나라의 침입(병자호란)으로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면서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 충격은 단순한 외교적 패배가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위기이자, 자존심의 붕괴였습니다. 이 후 조선에 외교 정책은 눈의 띄게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청나라를 오랑캐라 부르며, 사대의 예를 다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실리주의를 택하기 시작했지요. 효종의 북벌 시도가 끝난 뒤, 조선은 청나라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갔을까요?🧨 병자호란 이후 – 굴욕을 인정하지 않은 외교삼전도 굴욕의 여운인조는 청 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굴복조선은 청과 형식적인 군신관계를 맺었지만,내부적으로는 청을 ‘오랑캐’로 간주하며 인정하지 않음숭명반청 사상..

(역사)병자호란의 복수전 효종의 북벌정책

1636년 병자호란, 조선은 청나라(당시 후금)에게 무릎 꿇고 ‘삼전도 굴욕’을 당했습니다. 국왕 인조는 직접 청 태종 앞에 나아가 삼배구고두례를 올렸고, 왕자였던 봉림대군(훗날 효종)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 경험은 효종의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으며,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되었죠. 인조 이후 왕이 된 그는 “청에 당한 치욕을 반드시 되갚겠다”며 ‘북벌 정책’을 국정의 핵심 과제로 삼습니다. 하지만 그 결말은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북벌 정책의 원인 – 치욕과 자존심1. 병자호란의 충격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에게 굴욕적인 항복인질로 잡혀갔던 봉림대군(효종)의 강한 복수심2. 명나라에 대한 충절유교 국가로서 조선은 명나라를 ‘은혜의 나라’, 청을 ‘오랑캐’로 인..

(역사)한국인이 첫 부정선거와 독재정권을 끌어내린 4.19 혁명

대한민국은 수많은 민주화 운동을 거쳐 오늘의 자유와 권리를 얻었습니다. 그 중 1960년에 발생한 ‘4·19 혁명’은 국민의 힘으로 부정 선거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4·19는 단순한 학생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정치 부패, 자유 억압, 민심 무시가 어떤 결말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한층 더 강화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왜 4·19는 시작되었을까? – 원인 정리1. 이승만 정부의 장기집권 시도1948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이후 헌법을 고쳐가며 계속 집권했습니다.사사오입 개헌(1954):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금지 조항을 무효화부통령 이기붕 부자세습설 등으로 국민 불만 고조2. 3·15 부정 선거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

(역사) 조선의 대표적인 두 '군(君)' 광해군과 연산군

조선 역사에는 수많은 임금(왕)이 있었지만, 그중 ‘왕’이 아니라 ‘군(君)’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습니다.그 대표가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입니다. 두 사람 모두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폭정 혹은 정치적 몰락으로 인해 사후 ‘묘호(’를 받지 못한 비운의 임금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와 묘호를 받지 못했고, 다른 임금과는 다른 군(君)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을까요? 🌑 연산군(조선 제10대 왕, 재위 1494~1506)➤ 누구였나?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비운의 왕자어머니가 폐비되어 사사된 사건(폐비 윤씨 사건)에 충격을 받아 성군에서 폭군으로 변모➤ 주요 행적초기엔 문무 균형 정치를 추진했으나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난 뒤, 복수심으로 사림 세력 대대적으로 숙청→ 무오사화(1498), 갑자사..

(역사)조선의 수치 삼전도 굴욕 이후 조선의 변화

1636년,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는 청 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며 조선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외교적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바로 삼전도 굴욕입니다. 이 굴욕은 단지 한 왕의 무릎 꿇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왕의 자존심이 없어지고 조선 전체가 외교적으로 침묵해야 했으며, 백성들은 분노와 좌절 속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굴욕 이후, 조선은 문화로 저항하고 외교로 버텨냈습니다. 오늘은 삼전도 굴욕 이후 조선의 문화 변화와 청과의 외교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충격과 침묵, 그러나 꺾이지 않은 자존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형식적으로는 복속하게 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청을 오랑캐(夷狄)로 간주하는 ‘화이관(華夷觀)’을 고수했습니다.조정에..

(역사)조선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인조가 일으킨 인조반정

조선 역사에서 '반정(反正)'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쿠데타가 아닙니다. 이는 부당한 권력을 ‘바르게 되돌린다’는 명분 아래 벌어지는 정치적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대표적 반정이 바로 1623년, 인조반정입니다. 이 사건은 단지 왕이 바뀐 것에 그치지 않고, 이후 조선의 정치 노선과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훗날 후금(청나라)가 일으킨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비극의 서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왜 반정이 일어났을까? – 광해군에 대한 불만인조반정의 대상이 된 왕은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이었습니다.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서 전쟁 수습에 큰 공을 세웠고, 즉위 후에도 실리 외교와 개혁을 펼쳤지만, 정통성 문제와 정치적 폭압으로 인해 지배층의 반발을 샀습니다.폐모살제(生母 인목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