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 sense History(역사 공부)

(역사)차별에 의한 내전 임오군란

upsense 2025. 7. 4. 13:23

조선시대가 구한말에 들어서면서 세계 각지에서는 신식병기 및 개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도 예외는 아닌데요.

다만 신식병기를 도입하면서 차별에 따른 반란을 일으킨 사건인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년) 6월에 조선 한성(현재의 서울)에서 일어난 구식 군인들의 반란으로. 이 사건은 조선 후기 근대화 과정에서의 사회적 갈등외세의 개입이 맞물려 발생한 대표적인 반란 사건입니다. 이 군란은 단순한 군사 폭동을 넘어, 조선의 개화 정책에 대한 반감, 그리고 외세의 부당한 영향력 확대에 대한 반발을 함께 담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차별적인 군제 개편, 생활고, 부정부패, 그리고 일본의 개입이라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 배경: 서러움과 분노가 쌓이다

1. 구식 군인들의 처우 악화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구식 군인들에 대한 차별과 생활고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의 군사제도를 모방한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습니다. 이들은 무기, 훈련, 의복, 급여 면에서 모두 우대받았지만, 기존의 5군영을 해체당한 구식 군인들은 수개월간 월급조차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몇 달 만에 지급된 군량은 썩은 쌀에 모래와 잡곡을 섞은 수준의 부실한 식사였고, 이는 군인들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했습니다.

2. 정치적 불만과 민심 이반

당시 조선 정권은 명성황후의 친인척 세력인 민씨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개혁 추진 과정에서 백성들과 전통 세력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여기에 일본과의 불평등한 외교 관계, 청나라와의 미묘한 관계 변화가 더해지며 민심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 사건의 전개: 피로 물든 여름

1882년 6월 1일, 한성에서 폭동이 시작되었습니다.

  • 구식 군인들은 월급과 식량 문제를 항의하다가 무장 폭동으로 돌변했고,
  • 먼저 훈련대(별기군) 훈련장과 군수물자 창고를 습격한 뒤,
  • 왕궁인 경복궁을 공격하고 왕실을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의 폭동은 서울 시내의 민중 봉기로 확산되어, 각지의 백성들도 이에 동조하며 혼란은 극심해졌습니다. 특히 이들은 민씨 정권의 상징인 민겸호의 집, 그리고 개화파 실세 박영효, 김옥균 등의 거처를 불태웠습니다.

가장 큰 충격은 일본 공사관 습격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공사관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공사관 직원 다수와 일본인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공사 하야시 다다스는 가까스로 피신했으며, 이 사건은 조선을 향한 일본의 강력한 압박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폭동 당시 고종은 창덕궁으로 피신하였고, 명성황후는 궁을 탈출해 근처 민가에 숨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씨 일가와 별기군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 결과: 조선, 외세의 손아귀에 들어가다

1. 청나라의 파병

폭동 진압을 위해 조선은 청나라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고, 청군 3,000명이 한성에 상륙해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다시 청의 영향권에 편입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일본과의 제물포 조약

일본은 공사관과 자국민 피해를 이유로 조선과 제물포 조약(1882.7.30)을 체결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 5만 엔의 배상금과 군대 주둔권을 허용하며 외교적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받았습니다.

3. 개화 세력의 위축

임오군란으로 인해 개화 정책은 급격히 제동이 걸렸고, 개화파 인사들은 청나라로 망명하거나 정치적으로 매장되었습니다. 이들은 이후 갑신정변(1884)을 기획하게 되지만, 임오군란의 후유증은 오랫동안 조선을 흔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