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 sense History(역사 공부)

(역사)제주도 최대의 비극 제주 4.3사건

upsense 2025. 7. 7. 18:11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과 무력 충돌을 포함한 국가 폭력에 의한 대규모 인권 유린 사건입니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본격화되었기에 '4·3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지역적 폭동이 아니라, 해방 이후 남북 분단 과정 속에서 이념 갈등, 경찰의 탄압, 군정의 억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비극입니다.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여러 제주도민과 한국사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 배경: 혼란의 해방기, 억눌린 민심

1. 해방 이후의 혼돈

1945년 8월 광복 이후, 한반도는 미·소 양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한은 미군정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제주도 역시 미군정 아래 있었지만, 행정과 치안은 구 일본 경찰 및 친일 세력이 그대로 유지되는 등 도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2. 1947년 3.1절 발포 사건

1947년 3월 1일, 제주 북초등학교 앞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어린이를 포함한 6명이 사망했습니다. 이후 경찰과 우익 단체에 대한 반감이 커지며 도민 총파업과 시위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강경 진압이 도민들의 반정부 감정을 더욱 자극했습니다.


🔥 전개: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도 내 좌익 무장대(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는 경찰서와 우익 단체를 공격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5.10 단독 선거(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에 반대하며, 민중 봉기를 통해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했습니다.

이후 무장대와 토벌대 사이에 게릴라식 전투와 탄압, 보복이 반복되면서 사건은 급속히 확대되었습니다.


💥 국가의 탄압: 토벌 작전과 집단 학살

1. 1948년 이후 강경 진압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 국군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이 제주로 파병되어 본격적인 **‘토벌 작전’**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무장대뿐 아니라 비무장 민간인까지 ‘빨갱이’로 몰려 집단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거나 산으로 피신한 가족까지 색출
  • 모든 마을에 ‘해안선 5km 이내로 주민 이주’ 명령, 이를 위반한 사람들은 대부분 ‘적대 세력’으로 간주되어 즉결 처형됨

2.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과거 좌익 혐의자 및 가족들을 다시 체포·처형하는 2차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전체 제주 인구의 10%에 달하는 2~3만여 명이 희생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 결말과 진실 규명

사건은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령 해제와 함께 사실상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간 ‘폭동’, ‘반란’이라는 낙인 아래, 피해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고, 공식적으로 진실이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1999년 ‘제주 4·3 특별법’ 제정,
2003년 대통령 공식 사과(노무현 대통령),
2018년에는 진상조사 보고서 발표,
그리고 2021년에는 일부 희생자들의 형사재심 무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 오늘날의 의미: 기억하고 치유하는 역사

제주 4·3 사건은 단순한 지역 반란이 아닙니다. 국가 권력이 국민을 적으로 돌려 비극을 초래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념이 아닌, 인권과 평화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봐야 하며, 아직도 생존자와 유족의 치유와 회복은 진행 중입니다.

오늘날 제주 4·3은 단지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의 인권 감수성과 민주주의의 바로미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