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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초기 한반도 영토를 되찾기 위한 4군 6진 개척

upsense 2025. 5. 10. 12:55

조선 세종대왕 시기, 집현전과 함께 내부적으로 한글을 창제한 것과 별개로 외부적으로는 한반도 영토를 되찾기 위해 여진족으로 부터 영토를 회수하는 정책인 4군 6진 개척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와 같은 문화적 업적뿐만 아니라 북방 영토 확장에도 큰 족적을 남겼는데요, 바로 4군 6진 개척을 통해 한반도의 국경선을 지금의 모습으로 확립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럼, 이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보도록 하죠.

 


4군 6진이란?

4군 6진은 조선 세종 시기에 북방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 구역이에요.

  • 4군(四郡): 압록강 상류 지역인 평안도 북쪽에 설치된 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를 말합니다.
  • 6진(六鎭): 두만강 하류 지역인 함경도에 설치된 종성(鍾城), 온성(穩城), 회령(會寧),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령(富寧)을 의미합니다.

이 지역들은 원래 여진족이 거주하며 조선의 경계 바깥에 있었지만, 세종의 적극적인 북방 정책으로 조선 영토로 편입되었어요.

 


4군 6진을 개척한 목적

세종 시기, 조선은 북방의 여진족 침입으로 국경 방어가 시급한 상황이었어요. 또한, 고구려와 발해 시절의 영토를 되찾고자 하는 고토 수복의 열망도 컸죠. 세종은 단순히 방어에 그치지 않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자연 경계선으로 삼아 안정적인 국경선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은 현대 한반도의 북방 국경선을 형성하게 되었어요.


4군 6진 개척 과정

1. 군사적 정벌과 행정 구역 설치

세종은 1433년부터 본격적으로 북방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 4군 설치: 최윤덕 장군이 약 1만 5천 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며 여연, 자성, 무창, 우예에 4군을 설치했어요.
  • 6진 설치: 김종서 장군이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을 정벌하며 1434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을 설치했고, 1449년에 마지막으로 부령이 추가되어 6진이 완성되었어요.

2. 행성과 사민입거 정책

단순히 군사적 점령으로 끝난 게 아니에요. 세종은 지속 가능한 방어 체제를 위해 두 가지 정책을 병행했어요.

  • 행성(行城) 축조: 방어선을 따라 길게 성을 쌓는 작업으로, 1440년부터 시작되어 세종 사후까지 10년 넘게 이어졌어요. 황보인이 책임자로 임명되어 산과 강 지형을 활용하며 성을 축조했죠.
  • 사민입거(徙民入居): 새로 개척한 지역에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시키는 정책이에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남쪽 백성들을 이주시켰는데, 처음엔 토지와 관직, 세금 면제 혜택을 주며 자원자를 모집했지만 부족해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했어요.

개척 중 난관

하지만 개척 과정은 생각만큼 결코 쉽지 않았어요.

  • 척박한 환경: 당시 북방 지역은 기후가 가혹해 농사짓기 어려웠어요. 특히 함경도 지역은 연강수량이 적고 냉해가 잦아 벼농사가 힘들었죠.
  • 인력 부족과 저항: 이주민들은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기 어려웠고, 개척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강제 이주에 대한 백성들의 반발도 컸어요.
  • 지속적인 여진족의 위협: 여진족과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회유와 강경책을 병행하며 관리해야 했어요.

4군 6진의 의의

4군 6진 개척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조선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기반을 다진 중요한 사업이였습니다.

  • 국경선 확립: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현대 한반도의 북방 국경선이 이때 형성되었어요.
  • 방어 체제 강화: 행성과 6진을 통해 여진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 문화적 융합: 여진족과의 교린 정책을 통해 조선 내 여진족을 포용하며 다문화적 요소를 강화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