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에는 수많은 임금(왕)이 있었지만, 그중 ‘왕’이 아니라 ‘군(君)’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가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입니다. 두 사람 모두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폭정 혹은 정치적 몰락으로 인해 사후 ‘묘호(’를 받지 못한 비운의 임금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와 묘호를 받지 못했고, 다른 임금과는 다른 군(君)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을까요?
🌑 연산군(조선 제10대 왕, 재위 1494~1506)
➤ 누구였나?
-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비운의 왕자
- 어머니가 폐비되어 사사된 사건(폐비 윤씨 사건)에 충격을 받아 성군에서 폭군으로 변모
➤ 주요 행적
- 초기엔 문무 균형 정치를 추진했으나
-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난 뒤, 복수심으로 사림 세력 대대적으로 숙청
- →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주도
- 말기엔 국고를 탕진하며 향락과 사치를 일삼고, 폭정을 일삼음
➤ 최후
-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
- 백성의 분노와 신하들의 반발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침
- 사후 ‘왕’ 칭호 없이 ‘연산군’으로 남음
🌘 광해군(조선 제15대 왕, 재위 1608~1623)
➤ 누구였나?
- 선조의 둘째 아들이자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서 분조 운영
-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지만, 계승 정통성 문제와 정쟁 속에 희생당한 왕
➤ 주요 행적
- 실리 외교: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며 전쟁 회피
- 전후 복구: 임진왜란 이후 국토 복구, 백성 안정을 위해 노력
- 대동법 확대 시행, 약재 수급 개혁, 지리서·의학서 편찬 등 다방면에서 개혁 시도
- 하지만 **인목대비 폐위(폐모살제)**와 북인 일당 정권 운영이 비판 받음
➤ 최후
-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
- 강화도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조용히 생을 마침
- 사후 ‘광해군’으로 불리며 왕으로서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함
⚖️ 연산군과 광해군, 무엇이 달랐을까?
즉위 배경 |
성종의 적자, 왕비 소생 |
선조의 서자, 전란 중 공으로 세자 책봉 |
정치 방향 |
감정적 폭정, 향락 중심 |
실용 정치, 외교적 균형 |
사화 발생 |
무오사화·갑자사화 주도 |
북인 중심 독재, 물리적 숙청은 상대적으로 적음 |
개혁 시도 |
거의 없음 |
대동법, 군제 개혁, 외교 실리 노선 |
폐위 사유 |
폭정과 사치 |
정통성 논란, 폐모 사건, 서인과의 갈등 |
최후 |
폐위 후 유배 중 사망 |
유배지에서 조용히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