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 sense History(역사 공부)

(역사)조선초기 왜구를 향한 경고, 대마도 정벌

upsense 2025. 5. 5. 20:05

조선시대 초기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대마도 정벌, 특히 1419년 세종 원년에 이루어진 기해동정에 대하여 알고 계신가요? 조선 초기, 왜구의 침략으로 상당한 골머리를 앓던 조선이 어떻게 대마도를 정벌하고,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과 왜구의 외교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대마도 정벌의 배경: 왜구의 위협

조선 초기는 고려 말부터 이어진 왜구(현재의 일본)의 침략으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어요.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약탈하던 일본 해적 집단을 말하는데, 특히 고려 말기에는 그 피해가 극심했죠. 1350년부터 약 40년간 무려 300여 차례나 한반도를 침입하며 민중들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고 해요.
대마도(쓰시마 섬)는 왜구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어요. 이 섬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고, 원래 척박한 땅이라 식량을 고려와의 교역으로 충당하며 생계를 유지했어요. 하지만 여몽전쟁과 원나라의 일본 원정 이후 교역이 줄어들자, 대마도 주민들이 왜구로 변모해 약탈로 생계를 해결하기 시작했죠.
고려는 일본 정부에 왜구를 제어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시 일본은 남북조 시대라는 내전으로 중앙 통제가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특히 규슈 지역은 통제 불능 상태였죠. 이에 따라 조선은 직접 대마도를 정벌해 왜구의 뿌리를 뽑기로 결정했어요.
 


기해동정: 1419년 대마도 정벌

가장 유명한 대마도 정벌은 1419년(세종 1년)에 이루어진 제3차 대마도 정벌, 일명 기해동정이에요.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같은 해 5월에 발생한 비인현 왜구 사건이었어요. 1418년, 대마도주 종정무가 죽고 어린 아들 종정성이 뒤를 잇자, 대마도 내부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식량 부족과 내분으로 대마도 주민들이 다시 왜구로 변모해 조선 연안을 침략하기 시작했죠.
왜구는 5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충청도 비인현(현재 서천군)을 침입해 병선을 불태우고, 황해도 연평도까지 약탈한 뒤 요동반도로 진출했어요. 이에 조선의 상왕이었던 태종은 강경 대응을 결심하고 대마도 정벌을 선포했어요.
 


정벌의 전개

  • 지휘관과 병력: 태종은 이종무(李從茂) 장군을 삼군도체찰사로 임명해 정벌을 지휘하게 했어요. 이종무는 병선 227척과 병력 17,285명, 65일치 군량을 준비했어요. 중군, 좌군, 우군으로 나뉜 원정군은 거제도에서 출발해 대마도로 향했죠.
  • 전투 과정: 1419년 6월 19일, 원정군은 대마도에 도착해 두지포에 상륙했어요. 대마도 주민들은 처음엔 조선군을 자신들의 왜구 선단으로 착각해 환영했지만, 곧 대군임을 알고 도망쳤어요. 이종무는 항복을 권유했으나 응답이 없자 공격을 시작했어요. 조선군은 적선 129척을 불태우고, 가옥 1,939호를 파괴했으며, 곡식까지 베어버려 왜구의 생존 기반을 무너뜨렸어요.
  • 결과와 철수: 하지만 전투 중 좌군이 매복에 걸려 18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배했어요. 이종무는 장기전을 준비했으나 태풍 우려와 태종의 철수 명령으로 7월 3일 거제도로 돌아왔어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약 3,800명의 사상자를 낸 치열한 전투였죠.

정벌 이후: 대마도의 변화

정벌 후, 대마도주는 항복을 청하며 조선과의 평화적 관계를 요청했어요. 1419년 9월, 도주는 항복 문서를 보내고 조선의 신하로서 섬길 것을 약속했어요. 조선은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에게 종씨 도도웅와라는 인장을 내려 지위를 인정했어요.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통교하며 왜구 대신 평화적 중개자 역할로 변모했어요.
 


역사적 의미

기해동정은 조선 초기 한일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비록 군사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만, 왜구의 근거지를 타격하고 이후 왜구 침입을 크게 줄이는 데 성공했죠. 또한 대마도를 조선의 속주로 만들어 일본과의 외교적 긴장을 완화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정벌이 군사적으론 실패했다고 평가하기도 해요. 대마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이후 임진왜란 같은 큰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죠. 그래도 당시 조선이 해외 원정을 통해 왜구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시도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